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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고문은 2008년 2월 28일 워싱턴 포스트 지에 게재되었던 기고문, "기아가 북한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의 증보판으로 작성된 것이며, 한국개발연구원의 2008년 4월 북한경제리뷰에 발표된 것이다. 영어 원문은 휴먼라이츠워치 북한 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서론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조용히 집에서 정부의 배급을 기다리다 전부 굶어 죽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이 말은 반쯤 진담인 농담이다. 기아라는 재난이 어떤 사회에든 긍정적인 영향을 주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백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1990년대 중반의 기아가 일면 긍정적인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주민들이 기아에서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북한 정부는 그들의 일상 생활에 대한 통제력을 상당 부분 잃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은 보다 자립적이고 창의적이 되었다.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배급 제도를 새롭게 성장하는 시장 경제로 대체시키며 직접 생존할 길을 찾고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이다.

기아와 원조
기아 이전의 북한은 "은자의 왕국"이란 명칭이 걸 맞는 국가였다. 2천만 북한 주민들은 노동당의 선전만을 보도, 방송하는 국영 매체 외에는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를 갖지 못했다. 주민들이 자기 거주지의 인근 지역 밖으로 여행할 수 있는 경우는 가족의 결혼이나 장례식 등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국가 정보 기관은 자국민에 대해 5호 감시제를 포함한 엄격한 감시 체계를 운영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식량의 배급을 독점했다는 사실로, 이는 북한의 주민들이 그들의 유일한 식량 입수 방안을 잃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정부에 복종하고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몇 십 년에 걸친 정부의 농업 부문 관리부실, 수 년 간의 자연 재해, 그리고 구 소련과의 갑작스런 교역 종료는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북한의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본격적으로 악화된 기아로 진행시켰다. 1990년대 중반에는 정부가 대다수의 주민들에 대한 식량 배급을 중단했다. 식량 배급이 재개되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약 백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그 때는 사람들이 집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굶어 죽었습니다. 온 가족이 죽었는데 며칠이나 몇 주씩 발견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라고 회령 출신의 38세 남자가 인터뷰 중 진술했다.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과 미국, 일본, 중국, 한국 등 개별 국가들이 1995년부터 북한에 식량을 원조해왔으나, 북한 정부는 분배 감시 요원이 방문할 수 있는 지역이나 방문 횟수를 제한하고, 방문 시에는 최소 1주일 전에 사전 통보할 것을 요구하는 등 원조 식량의 분배에 대한 감시를 계속적으로 극심하게 제한해오고 있다. 일부 인도 지원 단체들은 북한 정부가 소외 계층 대신 군대로 식량을 빼돌리고 있다고 비난해 왔는데, 그렇다고 북한의 일반 군인들이 굶주림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해 출신의 30대 초반인 한 남성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복무했던 부대의 100명의 군인들 중 예닐곱 명이 기아로 사망했으며, 많은 수가 영양실조로 군 복무를 계속할 수 없어 집으로 돌려 보내졌다고 말했다.

생존 전략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굶주림을 참고 견디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상당 수의 북한 주민들이 자신의 소유물을 팔고 짐을 챙겨 도시를 떠나 보다 손쉽게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지방으로 이주했다. 지방에서는 집단 농장, 텃밭 등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주자들의 대다수는 여행 허가가 없었다. 그러나 경찰들조차 식량을 구하기 위해 떠돌아야 했던 상황에서 북한 당국은 이주자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북한이 인구를 통제하기 위해 적용했던 이동의 제한이 사실상 무너진 것이다. "저 역시 사람들을 감시하기 보다는 가족을 위해 식량을 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배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끔찍했습니다." 전 북한 정보 기관원이었던 한 탈북자가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엘리트 계급 출신이었던 그 조차도 기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에 많은 수가 식량과 일자리를 찾기 위해 중국으로 탈출했는데, 그 중 다수는 중국과의 접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중국 지역의 탈북자 중 많은 수가 불법 이민자로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을 당했으나, 일부는 가족들을 부양하고 새로 습득한 기술과 지식을 활용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돌아왔다. 이 귀향자들이 정부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북한 바깥 세상의 뉴스 또한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회령 출신인 19세의 여성이 기아에서 살아남은 북한 주민들의 사고방식을 인터뷰 중 설명했다. "94년 초반에 마지막으로 배급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스스로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요즘엔 국가에 의존하다가는 굶어 죽을 겁니다."

시장의 성장
한편 북한 전역에는 주요 식량 공급원으로서의 실효성을 잃어버린 식량 배급제를 대체하기 위한 시장들이 생겨났다. 초기의 시장은 절망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값이 나가는 것은 무엇이든 파는 물물교환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시장은 곧 이윤 창출을 위해 모든 것을 사고 파는 장소로 발전했다. 이제 북한은 수도인 평양과 그 밖의 지역까지 사람들이 필수품을 사고 파는 부산스러운 시장으로 가득하다. 이 시장들에서는 북한의 원화와 중국의 위안화, 미국의 달러까지 사용되고 있다. 해산 출신의 40세 여성은 최근 상인들이 달러나 위안화를 더 선호한다고 증언했다. "장사꾼들은 조선 돈을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돈 많은 장사꾼들은 집에 딸라(달러)를 쌓아 놓고 산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최근 북한 주민들은 집에서 만든 국수의 판매로부터 급행 버스의 운행, 부동산 개발까지 모든 종류의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사유지의 거래는 불법이며, 따라서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지만 북한 전역에 걸쳐 주거용 부동산이 거래되고 있으며 그 대상은 도시 아파트에서 농장까지 포괄적이다. 보통 구매자가 현금을 지불하면, 구매자와 판매자가 지역의 주거 관리 담당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주거자 명의를 변경한다. 개천 출신의 18세 여성은 개천의 사유 버스 운행 실태에 대해 설명했다. "버스 터미널에 가면 버스 상태나 출발 시간에 따라 국영과 개인 버스 중 선택해서 탈 수 있습니다. 정부도 당연히 이런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정부는 버스 운행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습니다."

다른 많은 북한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아, 원산 출신의 60세 여성이 진술했다. "지금 조선에서는 오직 돈 버는 것이 관심사입니다."

돈이면 만사형통
반면 이윤 창출을 위한 일부 경제 활동은 관련자들이 의도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사회적 파장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정보에 대한 더 많은 접근성을 이끌어 냈다. 남한 드라마와 영화의 수입 CD 및 DVD 거래가 성황을 이룬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여전히 상당수의 북한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기에 문화 상품에 돈을 쓰려고 하는 이러한 현상은 일면 의아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식량뿐 아니라 구경거리에도 굶주려있다. "저라면 한 끼 굶고 남조선 영화 보겠습니다." 2007년에 만난 한 10대 탈북자는 말했다.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살겠습니까?"

남한의 대중 문화가 침투하기 시작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북한의 도시 거주자들에게 남한이 북한보다 더 부유하고 자유롭다는 사실은 상식인 듯하다. 남한은 현재 세계13위의 경제 대국이며 민주 국가인 반면 북한은 여전히 빈곤한 독재 국가이다. 그러나 약 10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 사람들은 남한이 절망적으로 빈곤한 나라이며 그 수도인 서울은 매춘부와 걸인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그들은 북한이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해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윤 추구의 음성적인 측면을 조명하자면, 이 동일한 동기가 마약의 유통과 같은 사회적으로 해악이 되는 거래를 활성화 시키기도 했다. 30대 초반의 한 트럭 기사는 장시간 운전 시 졸음을 쫓기 위해 '얼음' 혹은 '빙두' 라고 불리는 각성제를 복용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한 여고생은 시장의 상인으로부터 감기약을 구입했는데 알고 보니 그 감기약이 빙두였다고 하며, 또 다른 여고생은 많은 동급생들이 호기심에서 빙두를 복용했다고 증언했다. 20대의 한 젊은 남성은 친구들과 재미로 빙두를 복용했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이 각성제의 중독성에 대해서는 가볍게 무시하는 반응을 보였다.

북한 정부의 대응
물론, 북한의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정일 정부는 여전히 도전 불가능해 보이는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린 아이들을 포함, 수 많은 사람들을 노예화하는 관리소 체제를 계속해서 운영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또한 국유 재산의 절도나 "비사회주의적" 행동 등에 대해 여전히 정기적인 공개 처형을 실행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심해진 관료들의 부패와 착복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다. 회령 출신의 한 40대 여성은 자신이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1/3이 어떻게 다양한 관료들에 의해 갈취되는 지를 설명했다. "주거, 전기, 물 관리 하는 간부들...... 일단 돈 냄새를 맡으면 바로 달려 들어서 무슨 핑계거리나 법 위반 사항을 찾아냅니다. 돈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한편 노동당, 군대나 의회에 의해 운영되는 국유 기업이 당연히 천연자원, 해산물, 버섯 등 수익성이 있는 사업을 장악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수출을 위한 것이다. 정부는 기아 시기에 잃어버린 통제력의 일부라도 되찾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지만, 이는 종종 실패로 끝났다. 예를 들어 2005년 후반에서 2006년 초반 사이, 북한 정부는 주식인 쌀의 시장 판매를 금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정부가 쌀 공급의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계속 비밀리에 쌀을 팔았다. 이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또한 2007년 이후, 북한 정부는 특정 연령대 이하의 여성들이 정부에서 지정한 일자리로 돌아가도록 강제하기 위해 그들이 시장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했다. (제한 연령은 시기와 장소, 정보원에 따라 다른데, 30세, 40세 혹은 49세일 때도 있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이 금지령은 국가에서 제공하는 일자리가 비록 임금을 지불하는 경우라도 그 수준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실패로 돌아갔다.

평성 출신의 18세 여성은 자신의 언니가 간호원으로 일하면서 받는 월 급여가 북한 통화로 1,500원에서 2,000원 사이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공식 환율에 따르면 미국 달러로 10불에서 13불 사이에 해당하는 금액이나 실제 시장에서는 0.40에서 0.60불의 가치에 해당한다.) 급여에서 노동당에 바치는 기부금과 다른 의무적 기부들을 제하고 나면, 이 간호원의 월 소득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쌀 1킬로그램 정도가 전부이다. 요약하자면, 대개의 북한 사람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일자리가 아닌 다른 수입원을 찾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북한 정부는 2004년 후반부터 국가의 허가 없이 북한을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더욱 가혹한 처벌을 가하겠다고 위협해왔다. 정부는 반복적으로 "비법 도강자" 들에게 이전처럼 수 개월의 단련형이 아닌, 수 년 간의 교화형이 선고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새로운 정책으로 인해 국경 수비대가 불법 도강자들로부터 챙기는 뇌물 액수는 확실히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최근 도강자들의 수가 두드러지게 감소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도강 자체를 완전하게 막지는 못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인들은 여전히 국경 수비대에게 뇌물을 주고 중국을 드나들고 있으며, 인신매매 업자들은 계속해서 절망적으로 빈곤한 북한 여성들, 때로는 16세 정도에 이르는 어린 여성들을 중국 농부들의 결혼 상대로 데려가고 있다.

동시에 북한 당국은 현재 진행 중인 이러한 사회 변화를 수입원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 당국이 지정한 직장에 출근하는 대신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민간인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실제로 자신의 직장에 기부금을 내야만 하는데, 그 액수는 종종 직장에서 지불하는 급여의 수 배에 달한다. 흥남 출신의 24세 남성은 이 제도가 어떻게 시행되는 지 증언했다. "로임을 주지도 않는 직장에 나가는 대신 장마당에서 돈을 법니다. 하지만 그냥 직장에 나가지 않으면 처벌을 받습니다. 그래서 돈을 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냥 내버려 둡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북한 정부가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시절의 포용 정책에 힘입어 남북 관계가 원만해지자 남한의 사업체들과 협력하여 몇몇 주요한 수익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북한 정부는 금강산의 절경에 이어 최근에는 개성 시를 남한 관광객들에게 개방했다. 또한 2004년 6월에는 개성 공업단지를 출범시켰는데 이제는 23,000명 규모의 북한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시계, 신발, 의류, 주방 기기, 자동차 부품 등 일련의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제품의 대부분은 남한 사업체들에 납품되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남북한 관계의 정치적 이슈와 무관하게 북한 정부의 귀중한 수입원으로 계속 되고 있다.

지속되는 식량 부족
비록 북한이 극심한 기아의 상태에서는 회복되었을지라도 식량 부족은 지속되고 있다. 북한은 장기간에 걸쳐 우량 종자, 화학비료 및 (기계 가동을 위한) 연료의 부족을 겪고 있으며, 진보된 농업 기술로부터 상당히 소외된 상태다. 사람들이 연료로 쓰기 위해 언덕과 산을 벌목하며 유발된 환경 파괴는 여름의 홍수로 이어져 식량 생산에 또 다른 피해를 주고 있다. 그 결과, 북한이 식량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는 국제 원조에 의존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쌀과 옥수수, 다른 기본 식료품들의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는 가운데, 북한의 춘궁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 북한 정부는, 두 전임자들과는 달리 원조 식량 분배를 제대로 감시하겠다고 공언한 남한의 새로운 보수 정권, 이명박 정부에게 식량 원조를 요청하지 않은 상태이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올해도 배고픈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결론
많은 북한 주민들에게 기아로 인해 촉발된 이 변화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제 역행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인터뷰했던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는 더 큰 변화를 원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젊은 세대가 희망하는 것은, 원하는 옷을 입고 싶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북한의 개혁과 개방과 같이 중대한 정치적 이슈까지 폭넓기 그지없다. 그들은 북한에서 반세기만의 최악의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다. 부모 세대에 비해 이 젊은 세대는 정보가 풍부하고 개방적이며 두려움이 없다. 바로 이 새로운 세대가 계속해서 북한에 더 큰 변화를 견인해 나갈 것이다.

케이 석은 휴먼라이츠워치 북한 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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