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탈북한 사람들이 북한에서의 경제 활동 제약과 심각한 억압 상황에 대해 증언했다.
- 탈북민들의 증언은 가뜩이나 제한되어 있는 주민들의 자유를 더욱 위축시킨 북한 당국의 억압적인 코로나19 조치가 가져온 심각한 영향을 보여준다.
- 유엔 인권이사회는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의 권한과, 북한 조사와 관련한 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권한을 갱신해야 한다.
(서울) - 전환기정의워킹그룹과 휴먼라이츠워치는 오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코로나19 팬데믹 중에 그리고 이후에 북한 당국이 단행한 극심한 억압과 경제활동 제한 조치에 대해 증언한 내용을 발표했다. 관련국들은 책임성 규명 조치와, 북한 주민들의 인권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8명의 탈북민이 북한의 참혹한 인권 상황과 인도주의 실상에 대해 전환기정의워킹그룹과 휴먼라이츠워치에 증언했다. 모든 인터뷰 참가자는 2020년에 북한 당국이 국경을 봉쇄한 후 코로나19에 대한 정보 부재, 이동 제한, 식량과 의약품 그리고 비료, 비누, 건전지와 같은 물품 수급의 어려움 등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이들은 또한 당국이 외국 매체 이용자 등을 겨냥한 사상 통제와 감시를 강화한 반면, 제한조치에 따른 경제적 영향을 완화할 수 있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환기정의워킹그룹의 이승주 프로파일러는 “이러한 증언들은 북한 당국의 억압적인 코로나19 조치가 가뜩이나 제한되어 있는 자유를 더욱 위축시킴으로써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유발했는지를 보여준다”면서 “관련국들은 북한의 인도주의 위기에 다시 관심을 두고, 인권탄압에 대한 책임 규명 조치들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4년 3월부터 2025년 2월까지 전환기정의워킹그룹과 휴먼라이츠워치는 2020년부터 2023년 사이에 북한의 다양한 지역에서 탈북한 남성 3명과 여성 5명을 인터뷰했다. 직업별로는 상인 5명, 어민 2명, 공장 노동자 1명이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익명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이 분석은 북한의 최근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32명을 포함하여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북한인 147명과의 인터뷰 등, 2014년부터 2023년까지 실시된 여러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표본 사이즈가 크지는 않지만, 인터뷰 참가자들의 다양한 나이와 성별, 지역, 사회 계층, 배경은 당시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의 견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증언은 휴먼라이츠워치가 2024년 3월에 발표한 보고서 ‘총알보다 깊이 파고드는 공포심: 2018-2023년 북한 봉쇄의 실상(A Sense of Terror Stronger than a Bullet’: The Closing of North Korea 2018–2023)’에 기록된 내용들과도 일치한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코로나19 팬데믹 중에 북한이 도입한 과도하고 불필요한 조치로 인해 가뜩이나 고립되어 있던 국가가 더욱 억압적으로 되었음을 확인했다. 허가 없이 북측 국경에 접근하는 모든 사람과 야생동물에 대한 현장 사살 명령 등 코로나19를 빌미로 도입된 조치들로 인해 탈북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러한 조치들은 또한 북한 경제에 타격을 주고, 사회적 및 경제적 권리의 실현을 저해했다.
팬데믹 이전에도 북한은 정보와 이동, 일상생활을 철저히 통제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고립된 국가 중 하나였다. 수십 년간 사회복지보다 군사화와 무기 프로그램을 우선시하는 정책으로 인해 북한은 식량난과 영양실조가 만연한 세계 최빈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닷가 마을에서 어부로 일했던 한 참가자는 “코로나19 [조치] 때문에 바다에 나갈 수 없어서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2020년 말에] 몇몇 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한 명이 붙잡혔다.”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당국은 종이에 ‘반역자’라고 적어 그 집 문에 못으로 박아놓고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고 했으며, 그 어부는 장기 강제노동수용소(교화소)로 보내졌다.
인터뷰 참가자들은 억압과 공포심, 사상 통제가 강화되었다고 말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2020년 이후 공개 처형이 증가했다고 증언했다. 황해남도에서 쌀 판매상을 하다가 2023년 5월에 탈북한 김일혁 씨는 2012년부터 2019년까지는 공개처형을 본 적이 없지만, 2020년에 상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2020년에 두 달에 한 번꼴로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것을 보았다. 2022년과 2023년에는 두 달 간격으로 한 번에 3명이 총살당했다.”고 말했다.
전환기정의워킹그룹과 휴먼라이츠워치는 2020년 이후 강화된 제한 조치가 두려움으로 주민들을 통제하는 공포정치와 결합하여 그렇잖아도 심각한 인권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설명했다. 당국의 조치는 그동안 비공식적인 국경 이동과 교역, 규제받지 않은 민간 시장 활동, 무허가 국내이동, 미인가 해외 매체의 이용 등을 통해 비교적 통제가 완화되었던 주민들의 숨통을 다시 조였다.
조직적인 인권유린의 증거가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계속해서 이를 부인하고 있다. 2024년 11월에 북한은 유엔 인권이사회의 북한 인권 관련 연례 결의안을 “정치적인 도발”로 일축했다. 2024년 11월 유엔 국가별 정례인권검토(UPR)에 대한 답변에서 북한은 코로나19 관련 조치를 강조하면서 인권 보호와 관련하여 “놀라울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에서 북한은 인권 관련 비판에 갈수록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이와 동시에 해외에서 활동하는 북한 인권 단체들은 예산이 크게 삭감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관련국들은 이들 단체가 독립적인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하고, 탈북민을 지원하며, 인권유린 상황을 기록하고,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도록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제58차 회기에서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의 권한과, 북한의 심각한 인권상황에 대한 책임성 규명과 관련하여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권한을 갱신해야 한다. 또한, 이사회의 대북 결의안에서는 북한의 무기개발과 군사화, 인권유린 간의 연관성을 더욱 철저히 조사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휴먼라이츠워치의 윤리나 한국 전문 선임연구원은 “북한 당국은 코로나19 팬데믹을 빌미로 통제와 억압을 강화하여 주민들을 굶주림에 몰아넣고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면서 “국제사회는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한 책임성을 요구하고 북한 주민들의 인권 수호를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을 강력히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참가자들의 신원과 북한 내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터뷰 참가자 이름은 익명으로 처리했다.
코로나19와 인권 존중
북한은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과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등 여러 핵심적인 국제인권조약의 당사국이다.
일할 권리와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2019년 이전까지 북한에서는 식량과 공산품의 국내 생산량 부족으로 인해 주민들이 중국과의 공식 및 비공식 교역과, 많은 경우 정부 허가 없이 이루어졌던 민간 시장 활동을 통해 비누, 치약, 속옷과 같은 생필품과 식량을 구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북한 정부는 2016년과 2017년에 부과된 부문별 유엔 제재로 인해 경제가 이미 위축된 상황에서 공식적인 대외무역을 엄격히 제한하고, 비공식 교역을 단속하고, 국내 이동을 통제하고, 민간에서의 무허가 상거래 활동을 제한하고, 시장 영업시간을 단축했다.
인터뷰에 참가한 탈북민들은 교역과 생계유지를 위한 돈벌이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북한의 북부 지방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탈북한 김아영 씨는 2020년 이후 생계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김 씨는 실로 모자를 떠서 중국에 팔아왔는데 팬데믹으로 인해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김 씨는 “코로나 때문에 텃밭 농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중단되거나 엄격히 제한되었다. (우리 지역) 사람들은 7월과 8월에 [돈벌이를 위해 열매나 약초, 뿌리를 캐러] 산에 갔는데 그것도 코로나 때문에 못 하게 됐다.”고 말했다.
쌀 판매상이었던 김일혁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의 식량 상황은 2022년부터 급격히 악화되었다…… 팬데믹 기간에 우리 지역에서는 당국이 장사를 통제하고 물품 유통을 차단했기 때문에 식량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당국은 식량을 파는 사람들을 반역자로 간주해서 엄격히 처벌했다. 나는 그때 쌀과 옥수수 같은 식량을 팔고 있었는데, 겁이 나서 그만두었다…… 장마당에서 곡물을 사고파는 것을 금지하니까 식량 가격이 급등했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23년 봄에는…… 길에 누워 있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봤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이 하루 이상 거기 누워 있었다고 했다…… 그런 일들이 많았다.
어부로 일했던 박영철 씨는 코로나19 때문에 당국이 어로 활동을 금지했다고 말했다. 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어로 활동을 금지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놀라지 않았다. 박 씨는 “한두 달 지나면 금지가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2020년 중반이 되자 주위 사람들이 소지품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한 친구는] 먹을 것이 없어서 테레비를 아주 헐값에 팔고 다른 값비싼 물건들도 반값에 내다 팔았다.”고 증언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바다에 나가서 잡아 온 것을 팔고 그 돈으로 옷이랑 먹거리를 사면서 그렇게 시장이 이루어졌다. 바다와 산에서 채취한 것들을 주로 거래했다. 일도 못 하게 하고 그런 모든 물품의 거래도 금지하니까 교역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집의 상황을 봤더니, 나는 덩치가 크고 많이 먹는다. 우리 어머니는 많이 안 드신다. 내가 먹는 양과, 아무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더 먹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봤더니 가진 것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다. 우리도 곧 갖고 있는 물건을 내다 팔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혁 씨의 동생도 어부였는데, 그 역시 2020년 2월부터 2023년 5월에 탈북할 때까지 바다에 나가지 못했다. 그것이 주요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도 어려움을 겪었다.
도시에서 식료품상을 했던 이혜경 씨는 코로나19 이전에는 과일을 팔아 돈을 많이 벌었지만 거의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고 말했다. 이 씨는 “그래도 돈을 조금 벌 수는 있었지만, 사는 게 훨씬 힘들어졌다. 돈을 신중하게 써야 했다. 코로나 전에는 식용유를 큰 깡통으로 샀는데 이제는 작은 병으로 사기 시작했다.”고 했다.
당국의 조치는 일반 주민들이 경제 활동을 하고 교역을 통해 돈을 버는 능력을 저해했다. 당국은 주민들이 일을 하고 돈을 벌 권리를 제한했으며, 그것은 다시 충분한 식량 등 적절한 생활 수준을 누릴 권리와 건강권 등 다른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를 저해했다.
식량, 의약품 및 수입 물품에 대한 접근성
팬데믹 기간에 북한은 국경을 엄격히 통제하고 국제사회의 백신 지원을 거절하면서 보건과 경제 위기를 심화시켰다. 2021년에는 백신 공급 확대를 위한 국제적인 프로젝트인 코백스(COVAX)와 한국, 러시아가 코로나19 백신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정부가 그러한 제안을 거부하거나 배송 준비를 하지 않아 수많은 주민들이 백신을 접종받지 못했다. 2022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중국 접경 지역과 평양, 남포 등 남부 지역의 일부 도시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진행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인터뷰 참가자 중에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인터뷰에 참여한 모든 탈북민은 물가 상승, 특히 식료품값 상승이 일반 주민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고 말했다. 인터뷰 참가자 중 2명은 탈북하기 전까지 먹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장 노동자였던 아영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의 모든 것] 심지어는 이쑤시개도 중국에서 수입한다. 중국과의 교역이 막히면서 모든 수입품의 가격이 폭등했다…… 설탕과 조미료 값이 가장 빠르게, 가장 많이 올랐고, 몇 달 사이에 식용유 값도 두 배로 뛰었다. 국경 봉쇄 전에 북한에 들어온 물건들만 나왔다…… 물건을 많이 쟁여놓고 있던 사람들만 돈을 많이 벌었다. 물건이나 돈이 없는 사람들은 살기가 아주 어려웠고 [돈이나 식량 등]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어부였던 영철 씨는 가진 돈이 다 떨어져서 굶는 사람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 옆집 사람은 남의 집에 가서 청소하고 요리해 주는 일을 했는데, 코로나로 다들 집에 있으니까 그런 일감이 없어졌다. 사정이 딱하니까 2020년 여름에 우리 집에 와서 밥을 한 번 먹었는데 우리도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다. 나중에 친척들한테 돈을 좀 구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식료품상으로 일했으며, 2020년부터 2023년 사이에 황해남도 벽성군에서 공개처형을 수십 차례 목격했다고 증언한 일혁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량이 귀해지니까…… 노인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 칼로 찔러 죽이고 먹을 것과 돈을 훔치거나,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먹을 것을 훔치는 것 같은 폭력 범죄가 증가했다. 북한에서는 먹을 것이 없으니까 강도질을 하다가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점점 더 흔해졌다. 당국은 그런 사건들을 이용해서 공포심을 조장하고 주민들을 통제했다.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까…… 내가 본 공개 처형의 90퍼센트는 이런 유형의 폭력 범죄 때문이었다.
인터뷰 참가자들은 또한 약값이 치솟고 구하기도 어려워졌다고 증언했다. 몇몇 참가자는 2020년 이후 어떠한 약도 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어부였던 영철 씨는 “어머니가 약을 드셔야 했는데 구할 수 없어서 쑥뜸이나 침 같은 한방 치료만 받으셨다. 그래도 돈을 못 벌면…… 제일 큰 걱정은 먹거리다.”고 말했다.
식료품상이었던 혜경 씨는 “약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면서 경제난이 주민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경기가 안 좋으면 사람들이 이발을 안 하는데 남자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2021년과 2022년에 내가 살던 곳에서는 [주식 중 제일 싼] 옥수숫가루도 사지 못해서 굶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 집에서는 [국경 봉쇄 1년 후에] 건전지로 가는 모든 벽시계가 멈췄다…… 내가 떠나던 날까지 다 죽어 있었다.
쌀 판매상이었던 일혁 씨는 건전지가 없어서 2020년 말에 자신의 벽시계가 멈췄고 2023년 5월 탈북할 때까지 못 고쳐서 휴대전화 시계를 봤다고 말했다. 그는 길에서 시간을 묻는 것이 인사처럼 되었다고 했다. 일혁 씨는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서 지금 몇 시쯤 되었냐고 물었다”면서 하루에 거의 백 번 정도 휴대전화를 꺼내봤다고 했다. 그는 잘 사는 편이었고 집에 판매용 곡물도 있었는데 당국이 곡물을 압수해 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2020년 가을에 [보안원들이 우리 집에 와서] 곡물을 가져가 버렸다. 내가 왜 가져가냐고 했더니 “야이 새끼야, 이 땅에 네 것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알아? 네가 서 있는 땅도 네 것이 아니고, 네가 숨 쉬는 공기도 [조선노동]당의 것이야.”라고 했다…… 당의 지시를 거역하면 정치범으로 끌려갈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 집을 뒤져 모든 식량을 압수해 갔다.
정보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
북한은 언제나 사상과 의견, 표현, 종교의 자유와 정보 접근성을 엄격히 제한해 왔다. 2020년 이후 당국은 선전선동을 대폭 강화하고, 새로운 법률을 통과시키고, 표현의 자유와 코로나19 관련 정보 등 모든 정보를 더욱 통제하기 위한 정책을 단행했다. 당국은 외국으로부터의 정보 유입과 북한 내부 상황의 해외 유출을 단속했다.
2020년에 북한 정부는 수입품, 철새와 야생동물, 하늘에서 내리는 눈,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를 통해 코로나19가 확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가 그러한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한 후에도 오랫동안 북한은 주민들에게 그렇게 홍보했다. 2020년 8월 이후 북한은 코로나19를 빌미로 하여 “코로나19가 공기와 물건을 통해 전파”된다는 이유로 북측 국경에서의 현장 사살 명령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인터뷰 참가자들은 코로나19에 대한 정확하고 과학적인 정보 등 관련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식료품상이었던 혜경 씨는 “인민반 회의에서 각자 조심하고, 여럿이 모이지 말고, 서로 가까이 붙어 앉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코로나19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바다와 연관이 있거나, 바닷가 근처에서 일하는 지인이 있었던 인터뷰 참가자들은 코로나19가 물을 통해서 전파될 수 있기 때문에 해상과 국경 이동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공장 노동자였던 아영 씨는 “당국은 코로나19가 물을 통해 전염될 수 있다면서 [물가에 사는] 사람들이 인근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고 증언했다. 어부였던 영철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국은]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했다…… [해안가로] 떠밀려온 것도 코로나19에 걸릴 수 있다면서 줍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바닷가 근처에 가는 사람은 적으로 간주되었다…… 또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야생동물이 들어오면 코로나19에 걸려 사람한테 전파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야생동물의 이동을 막기 위해 철조망에 고압 전류를 연결했다. 나는 철조망에 전기가 흐른다는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로 전기를 연결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외부 정보에 대한 접근이 더욱 엄격히 통제되면서 일반 주민들은 자신의 건강과 관련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전혀 얻지 못했다.
2020년 이후 북한은 외국 매체의 밀반입, 소비 및 유통과, 남한말 사용 등 외국 문화 모방 행위를 가혹히 처벌하는 등 외세와 ‘반사회주의적’ 영향을 막기 위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법률은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주입하기 위한 공개 처형을 포함하여, 반역죄 등 중범죄에 대한 것보다도 더 가혹한 처벌을 규정했다.
모든 인터뷰 참가자는 외국 매체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고 주민들 사이에 두려움이 커졌다고 증언했다. 공장 노동자였던 아영 씨는 “탈북하기 전에 전반적으로 두려움이 커졌다. 치솟는 물가 때문이기도 했지만 비디오 보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야채상을 했던 김진주 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처벌이 훨씬 가혹해졌다. 마약 [거래], 불법 비디오, 미신 등과 관련된 범죄는 장기 강제노역형에 처해졌고, 재범은 사형을 당했다.”고 전했다.
북한에서 일반 주민들은 언제 새 법률이 통과되는지를 알지 못하며, 법률 자체를 접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2021년 이후 탈북한 인터뷰 참가자들은 모두 2020년 12월에 통과된 반동사상문화배격법과 거기에 명시된 가혹한 처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부였던 영철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 법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런 행동을 하면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는 메시지였다. 나는 인민반 학습 시간에 그 법에 대해 들었다. 사람들에게 그 법문을 적어서 문에 붙여놓으라고 했다…… 인민반에서는 적을 내용을 나눠주었다…… [당국은] 사람들이 그 법문을 집 안에 붙여두고 날마다 보게 했다…… 2주쯤 지난 후에 인민반 반장이 지나다니면서 그 법문이 붙어 있는지를 확인했다.
쌀 판매상이었던 일혁 씨는 자신이 있던 지역에서 ‘반사회주의적’ 활동을 감시하고 단속하는 ‘82연합지휘부’가 남한 매체 시청 행위, 장마당 활동, 미신이나 종교 활동, 무직자와 동거자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2017년 이전에는 가정방문 점검이 일 년에 두 번, 보통 봄가을에 진행됐다. 그러다 2018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하기 시작했다. 특별 점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집들은 사흘에 한 번씩 점검을 받았고, 기술에 밝은 아이들이 있는 집은 특히 더 엄격하게 감시했다. 2023년 1월부터 5월까지 우리 동네에서 젊은 애들 15명이 끌려갔다. 15명 중 한 명이라도 걸리면 그 아이랑 연관된 모든 사람이 조사받는다. 불과 며칠 사이에 그 일이 벌어졌다……2020년 이후에 내가 본 공개 처형 중 10퍼센트 가량이 [외국 매체] 콘텐츠 [시청, 유통] 관련 범죄였다.
2022년 7월 26일에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 따라 공개 처형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한 농장 노동자의 22살 된 아들이 남한 노래 70곡을 듣고, 영화 3편을 보고, 그것을 돌려봤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했다. 처형을 본 사람들은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우리 중 다수가 그런 것을 봤기 때문에] 그냥 덜덜 떨기만 했다…… 고위 공직자의 자식들도 걸렸지만, 그 애들은 처벌을 면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농장 노동자들의 아들딸만 처형해서 공포감을 조성하고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못 하게 했다.